-
1. 2023년 4월 2일. 바람이 무척 심하게 불었습니다. 마른 땅이 갈라지는 산언덕에서 불이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바람 타고 날아다닌 불은 축구장 2,300개가 넘는 넓이를 휘감아 타올랐습니다. 길에서 만난 할머니가 그때를 떠올리며 조용히 들려준 말은 덧붙일 것이 없었습니다. “무서웠어…”
2년이 지났습니다. 불타고 쓰러지고 뭉개진 나무를 치우는 시간이었습니다. 사진기를 들고 반듯해진 길을 따라나섰습니다. 얼마 만인가요. 모든 산이 이렇게 숨겨진 모습을 드러낸 것이. 바람이 일기 시작합니다. 바람 따라가는 곳마다 온통 비어 있습니다. 오히려 단정하다고 할까. 불탄 자리에 새롭게 지은 작은 집이 낯설게 있습니다. 둘러보면 어느 집도 주변에 눈물의 흔적은 없습니다. 흔적마저 탔을까요.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은데, 저기 한쪽에 베고 남은 밑동이 검게 그을려 있습니다. 상처를 차마 드러내지 못하는 듯 돌아앉아 있습니다. 드러내면 안 될 것 같이 애써 숨기고 있는 듯한 모습이 처연합니다. 가만히 바라보다 눈물이 납니다. 무서웠을 텐데 무서움조차 가리느라고 흔적이 없었구나. 주춤거리며 조용한 모습들을 사진에 담기 시작했습니다. 사진이라도 흔적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으로…. 이렇게 담은 사진 몇 장을 올해 제18회를 맞는 ‘전주국제사진제’에 출품해서 전시하는 중입니다.
2. 지난 2년간 산불 지역을 지나다니며 보고 또 본 모습. 가까워서 남의 일 같지 않고, 제가 사는 마을 사람들과 이런저런 연으로 연결돼서 산불 당시에 다 같이 발을 동동 굴러야 했던 그 안타까움은 2년이 지나도 또렷이 남아있습니다. 당시 마을에서는 중대형 살수차를 수소문해서 급히 산불 지역에 보내기도 했습니다.
2년이 지나면서 산불 자리에 있던 대다수 나무가 정리되었습니다. 많은 산이 속살을 훤히 드러내고, 등성이에 여전히 서 있는 나무들은 거의 죽은 나무입니다. 대체 묘목들이 심어지고, 어떤 것은 제법 줄기와 잎을 드러냅니다. 더 무성해지기 전에 지금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지난겨울부터 산불 자리를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었습니다. 산불이 났던 지역은 홍성군 서부면 일대입니다. 서부면은 서해 천수만을 끼고 있는 곳입니다. 그날 바람이 불고 불이 바다로 몰려갔습니다. 기록을 보면 이렇습니다.
“2023년 4월 2일 11시경 충청남도 홍성군 서부면 중리 538에서 산불이 발생했다. 몇 주째 내리지 않는 비로 인한 건조한 대기와 강한 바람, 서부면의 험준한 산 지형으로 인해 산불 세력이 극대화되었다. 이 기록은 산불 피해 면적 역대 10위권 규모에 해당한다. 산불로 인해 소실된 면적은 서부면 전체 면적 5,582㏊의 26%인 1,454ha에 달하고, 서부면 산 면적 70%가 소실되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 홍성 산불 피해 지역인 홍성군에 특별재난지역을 선포했다.”
산불이 발생한 산은 2022년에도 산불이 크게 발생했던 곳입니다. 조사 내용을 보면, 발화 당일 죽은 나무를 벌목해서 임도를 만들기 위해 작업자 3명이 일하는데 그중 작업자 1명이 흡연 후 꽁초를 산에 버렸고 이에 따라 발생한 화염이 근처 풀과 가지에 옮겨붙었고 강한 바람으로 인해 세력을 향상함에 따라 대규모 산불로 확산한 것으로 추측한다고 나옵니다.
피해 현황을 보면, 민가 피해는 집 41채 전소, 12채 반소이고, 이재민은 53가구 91명입니다. 축산업 시설물 피해로 21동 전소, 8동 반소, 가축 피해로 소 44마리, 돼지 860마리, 염소 97마리, 닭 6만 7,627마리, 기타 31마리입니다. 그 외에도 큰 피해가 있었습니다. 피해 마을이 서부면 전체 33개 마을 중 28개 마을이고 옆에 결성면 3개 마을도 피해를 보았고, 그렇게 우리나라 역대 최악 산불 지역 가운데 한 곳이 되었습니다.
3. 홍성 산불이 발생하기 한 달 전인 2023년 3월 1일 경북 울진군을 방문했습니다. 1년 전인 2022년 3월 4일 울진군과 삼척시에서 일어난 산불로 피해당한 마을과 교회를 방문하고 마을공동체 회복 사업에 작은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마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산불이 난 지역을 돌아보는데, 충격을 받았습니다. 산불 지역에 들어가서 현장을 보는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이 지역이 자연산 송이버섯 채취가 본업이다시피 한 곳인데, 소나무가 사라지면서 모든 것이 사라졌습니다. 큰길 주변 산들을 보면 그날, 불이 얼마나 날아다녔는지 몸으로 느낄 정도였습니다.
산림청의 발표에 따르면 2022년 3월 4일 오전 11시경 울진군 북면 두천리 야산에서 산불이 발생했습니다. 산불은 강풍과 건조한 날씨 속에서 전선 스파크로 인해 발화한 것으로 추정한다지만 기록으로는 원인 불명입니다. 산불 규모는 당시 역대 최악에 꼽힙니다. 산림청이 관련 통계를 집계한 1986년 이후 ‘가장 오래 지속된 산불’이라는 기록을 남겼고 피해 추정 면적은 2만 923ha(울진 1만 8,463ha, 삼척 2,460ha)에 이르렀습니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발생하지 않았으나 주택 319채, 농·축산시설 139개소, 공장·창고 154개소, 종교시설 등 31개소가 소실되는 등 총 643개소라는 막대한 피해를 보았습니다.
마을 앞에 펼쳐진 넓은 바다의 파도 소리는 평화로웠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흔적은 무겁기 그지없었습니다. 경제적 기반이 손실된 마을공동체 회복도 큰일이었습니다. 이틀 정도 머물면서 많은 도움을 줄 순 없었지만, 앞으로 회복을 위한 국가와 지자체 공모사업 신청하는 일과, 실제로 마을과 교회가 함께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 가감 없이 의견을 나누었고 무엇보다 공동체 일원이라는 인식의 중요성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제가 사는 곳으로 돌아와서 한 달 후에 홍성 산불을 만났습니다.
4. 2년이 지나면서 홍성 산불 지역은 차분해졌습니다. 홍성군 서부면을 이루는 모든 산이 비워졌다고 할까요. 맨살이 드러난 능선 위로 군데군데 서 있는 나무 몇 그루가 오히려 아름답게 보일 정도로 전혀 다르게 변한 산 모습은 산 아랫마을에 오랫동안 살던 이들에게도 낯설게 보였을 것입니다. 겨울부터 초봄까지 시간이 날 때마다 산속에 들어가서 이런저런 모습을 사진에 담던 중, 3월 22일 의성 산불 발생 소식을 들었고 곧 청송으로, 안동으로, 영덕으로 산불이 퍼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번에 산불 피해를 크게 당한 안동시 일직면에 처가가 있습니다. 나이 많으신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살고 있습니다. 자주는 아니어도 오랫동안 가뵙는 곳이라서 제집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의성 안평에서 산불이 발생했을 때만 해도 일직면 걱정은 하지 않았는데, 다음날 일직면에서 불과 직선거리 2㎞ 지점까지 불길이 번진 것을 보면서 큰일이 벌어지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25일부터 바람을 타고 안동으로 불이 날아오면서 곳곳이 타올랐습니다. 장인어른의 말씀을 들으니, 산불이 점점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순식간에 포탄 떨어지듯이 떨어져서 빨리 피하는 것 외에는 도저히 막을 길이 없었다고 합니다.
처가 바로 옆에 4층 빌라 2동이 있는데, 한 동은 전소했습니다. 사람이 살지 않은 집이지만 건너편 집도 전소했습니다. 처가는 창고와 주변이 불탔습니다. 불길이 조금 진정된 후에 안동에 갔습니다. 일직면을 둘러봤습니다. 곳곳이 처참한 상황 그대로입니다.
일직면 원리에서 박귀자 이장을 만났습니다. 박귀자 원리 이장은 “남편과 화물차로 어르신들과 장애인을 직접 태워 대피시켰어요. 마을 85가구 중 70%가 불에 탔지만, 제때 몸을 피한 덕분에 인명피해는 없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지은 지 8년 된 본인 집은 산불로 전소되었다며 집을 가리키는 그이 시선 속에 안타까움이 가득 묻어났습니다. 그나마 원리 마을에 있는 국가유산인 서산서원은 산불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영남 지역을 휩쓸고 간 초대형 산불은 역대급 피해를 남겼습니다. 사망자 31명, 부상자 51명 등 총 82명의 인명피해와 3,000명 이상의 이재민, 7,800여 곳의 시설물 피해를 냈습니다. 산불 영향 면적은 서울 면적(약 6만ha)의 80%인 4만8,238ha에 달하며 피해 규모는 2조 원에 육박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돌이킬 수 없는 산불은 갈수록 더 자주, 더 큰 규모로 찾아오고 있습니다. 통계를 찾아보니 연평균 대형산불은 2010년대 1.3건에서 2020년대 4.8건으로 늘었고, 평균 산불 면적 역시 857ha(857만㎡)에서 6,270ha(6,270만㎡)로 7.8배 넓어졌습니다.
5. 전문가들은 산불이 대형화하는 데 불씨를 제공한 것은 기후변화라고 합니다. 지난 100년간 한국의 겨울 평균 기온은 4℃ 상승했고, 강수량은 17㎜ 줄었습니다. 전 세계에서도 산불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습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산불 여파가 가시기 전인 3월 초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발생한 산불은 여의도 면적의 8배를 불태웠고, 태국 치앙마이에서도 산불이 2주 넘게 이어졌습니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강원 동해안 지역에서 산불이 많이 발생했습니다. 이제는 산불에 대한 공식이 무의미해진 상황입니다. 산림청에는 ‘아카시아꽃이 피면 산불은 없다’라는 말이 내려온다고 합니다. 하지만 2022년 밀양 산불도 5월 말에 발생해 6월 초까지 이어졌습니다. 3~4월 건조기뿐 아니라 장마가 오기 전까지, 그리고 겨울에도 산불을 조심해야 하는 때가 됐습니다.
아무튼, 뜻하지 않게 요 근래 3년 정도 사이에 직간접으로 여러 산불을 마주했습니다. 올봄에는 산불 지역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하다가 현실이 된 안동 산불에 가까이 가야 했습니다. 일상이 흔들립니다. 기후 위기에서 파생하는 복합적인 원인이 맞물린 구조적 재난이 일상이 될 위험이 커지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진행된 단일 수종 중심의 산림정책도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의성과 안동 등에서 발생한 산불을 보면 산불은 산림청의 일도, 한 지역의 문제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기후 위기 속에서 구조적 한계와 정책의 허점이 뒤섞인 복합적 국가 재난이라는 생각입니다. 특히 잘못된 산림정책이 기후 위기와 맞물려서 지금 마주하는 위험을 더욱더 크게 만들 수 있다는 불안감을 해소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홍성 산불 지역에 심는 대체 묘목들을 보면 이런 우려를 감출 수가 없습니다. 무심코 지나쳤더라면 몰랐을 일들이 산불 지역 사진을 찍다 보니 하나씩 눈에 들어옵니다.
6. 산불은 도시보다 소멸 위험이 크다고 하는 농산어촌 지역에서 주로 일어나고 산불보다 더 빠른 속도로 많은 문제를 발생합니다. 산불로 인해 고령층이 겪는 어려움과 지역 경제 퇴보, 산불 이후의 정신적 트라우마는 지역사회를 황폐화하는 불씨가 됩니다. 한 가족의 삶 그리고 마을공동체 전체가 무너지는 재난이 이제는 더 가까이 곁에 있다고 생각하니 두려울 뿐입니다.
그동안 찍은 사진을 정리합니다. 사진 속에 문제 해결의 답은 없습니다. 지금 모습을 돌아보게 할 뿐입니다. 아마도 답은 나와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상식적일 것입니다. 산불과 같은 재난은 언제든지 일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지역사회의 재난 관리 시스템이 더욱더 철저하게 점검되고 개선되어야 합니다. 또 재난의 아픔을 딛고 마을공동체가 회복하는 과정은 매우 중요합니다. 집을 다시 짓고 피해를 복구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만,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불안과 공포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재난 앞에서 상식적인 실천이 필요합니다.
내년에는, 또 2년 후에는 어떤 모습일까요? 저는 앞으로도 틈틈이 시간이 지난 산불 지역 모습을 사진에 계속 담으려고 합니다. 사진 속에 산불에 대처하는 모습이 계속 변화하며 발전하는 과정으로 담기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