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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약자를 기억하는 2025년농촌이야기 2024. 12. 9. 18:24
- 농민, 여성 농민을 중심으로 -
1. 2024년도에 기억에 남는 일이 여럿 있는데, 그중 충격적인 것은 전라북도 진안군 마이산 근처의 벼멸구 피해를 본 가을 논 모습이었습니다. 추수를 앞뒀지만, 황금색 물결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갑작스러운 벼멸구 출몰로 보기도 흉한 누렇게 말라붙은 논 모습은 보는 자체만으로도 무척 안타까웠습니다.
벼멸구는 벼 줄기 하단의 즙을 빨아 먹어 피해를 주는 해충입니다. 피해를 보면 벼가 잘 자라지 않으며 말라죽기도 하고, 분비물로 인해 그을음병이 발생하여 2차 피해까지 초래합니다. 수확량이 감소하는 것은 물론이고 쌀 품질까지 떨어집니다. 벼멸구가 무서운 이유는 번식력이 엄청나게 빠르다는 겁니다. 전남·전북·충남 등 벼 주산지는 물론 충북·경남까지 전국 대부분 지역에서 벼멸구 발생했는데, 벼멸구 피해로 논의 70%가 초토화된 지역까지 있었습니다. 농가들의 피해가 얼마나 컸던지 이번 벼멸구 피해가 최초 농업재해로 인정될 정도였습니다. 조사 결과를 보면, 지난가을 갑작스러운 벼멸구 출몰은 이상 기후 여파로 보고 있습니다. 진안군의 황폐한 논이 안타까운 것은 앞으로도 기후 위기 속에서 농민은 피해를 당할 수밖에 없는 약자라는 것입니다.
“‘정부가 기후 위기 재난 예방을 위한 사전 준비를 잘하고 있다’ 7.2%. ‘정부가 기후 위기 재난 발생 시 즉각적인 대처를 잘하고 있다’ 12.2%. ‘정부가 기후 위기 재난 피해자에게 일상 회복 지원을 잘하고 있다’ 7.4%.”
국가인권위원회가 2024년 초에 발표한 ‘기후 위기와 주거권에 관한 실태조사’에 실린 통계로 농민들이 기후 위기 상황에 대한 정부 대처를 평가한 부분입니다. 지난 4·10 총선에서 각 정당은 기후 위기 대응 정책을 여러 개 내놓았지만, 농업과 농민을 보호하는 내용은 빈약했습니다.
정부의 기후 관련 정책은 여전히 부족합니다. 국제 기후 변화 정책 분석 전문기관인 저먼워치 등이 2023년 12월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서 발표한 주요국 기후변화대응지수(CCPI) 평가에서 한국은 유럽연합을 포함한 64개국 가운데 61위를 기록했는데, 특이점은 이들 기관이 평가 대상 중에 1~3위를 달성했다고 할 만한 나라가 없다는 이유로 4위부터 67위까지 순위를 매겨 한국의 공식 순위는 64위가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보다 낮은 순위를 기록한 나라는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산유국뿐이었습니다.
2. 기후 위기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우리 사회에 통용된 건 2010년대 후반부터입니다. ‘기후 변화’ 대신 ‘기후 위기’라는 말이 나온 것은 ‘늦었지만, 더 늦기 전에 행동으로 나서야 한다’라는 절박함 때문입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지구의 평균기온이 상승하면서 기후 패턴이 급격하게 변화하는 기후 위기를 초래한 책임으로부터 농업이 자유로운 건 아닙니다. 그런데 농업이 기후 위기를 초래한 원인 중 하나로 지목받는 것은 농업 자체가 아니라 농산물 자유무역 체계에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합니다. 화학비료, 살충제, 제초제, 항생물질 등에 크게 의존하는 산업적 영농방식과 이런 영농방식을 주도해 온 거대 농기업과 곡물 메이저들이 몸집을 키워온 사이에 기후 위기는 더욱 심각해졌다고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기후 위기에 농업이 몇 퍼센트를 차지하느냐는 등의 수치를 내세우기 전에 누구에 의한 온실가스인지 명확히 봐야 합니다.
농민은 기후를 생계 밑천으로 삼습니다. 기후 위기를 가장 체감하고 있으며 그로 인한 피해에도 가장 가혹하게 노출돼 있습니다. 2024년은 특히 기후 변화로 인한 폐해가 컸습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끊임없이 꼬리를 문 기상이변은 그간 축적해 온 농민들의 경험을 소용없게 하고 대응마저 무력하게 만들었습니다. 기상이변은 이제 해마다 점점 더 심해지는 양상을 보입니다. 진짜 재난은 아직 시작되지 않은 것일 수 있다는 말도 듣습니다.
기후 위기로 농민이 직면하는 어려움은 무척 많습니다. 무엇보다 해충의 개체수가 증가하면서 방제 비용은 늘어나고 생산량은 감소하고 있습니다. 열대성 해충이 국내로 날아드는 경우도 많아지면서 농민들은 이웃 나라의 해충까지 방제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폭염에 모종이 녹아내리고, 생산비는 늘고, 농업소득은 줄어드는 구조가 되었습니다. 기후 위기의 폐해를 가장 심각하게 받는 것이 농업이고 농민입니다. 2021년 국가인권위원회의 국민인식 조사에서 응답자의 47.5%가 기후 위기로 인한 피해가 가장 큰 집단으로 농어민을 꼽았습니다.
3. 2018년 12월에 유엔(UN) 총회에서 채택된 ‘농민과 농촌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권리선언’(‘농민권리선언’)을 보면,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지속 가능한 농식품 체계는 농민이 주도하는 생태농업이라는 것을 명확히 합니다. 생태농업은 사회적·경제적·생태적 순환을 바탕으로 지역의 자원을 촘촘하게 엮어내는 일에 농민 농업을 중심에 두고 먹거리 선순환 체계를 구축하는 농업입니다. 기후 위기 시대에 생태농업은 지역과 함께하는 연대와 협력체계를 강화해야 하며, 식량주권을 위한 농민 권리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직 이 선언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농민은 기후 위기 시대에 가장 약자이자 피해자 중 하나입니다. 기후 위기로 농업은 몸살을 앓고 작황도 형편이 없을뿐더러 농자재값은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습니다. 생산비가 반영되어 농산물 가격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수확량이 적어서 농산물 가격이 올라가고 있습니다. 농업소득은 오히려 줄어드는 상황인데, 그 부담을 오롯이 농민에게 강요합니다.
기후 위기는 특히 농민의 인권 문제입니다. 농민의 고통은 정의의 문제와 연관됩니다. 기후 위기로 인해 가중되는 고통은 농민 스스로 해결해야 할 농민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정부는 기후 위기 최전선에 있는 농민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절차적 권리를 보장할 책무가 있습니다. 기후 약자가 돼버린 농민 인권의 관점에서 접근할 때 현실적이며 지속할 수 있는 먹을거리 해법을 함께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4. 제가 사는 보령에서 여성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부위원장으로 얼마 전까지 참여했습니다. 그동안 여성 친화적 도시를 위한 교육도 받고, 양성평등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도 얻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새삼 느낀 것은 여성, 노약자, 장애인 등은 대다수 경우에 같은 말이라는 것입니다. 모두 사회의 평등한 구성원으로 각자 역량이 드러나고, 그러기 위해 삶의 터전에 필요한 돌봄과 안전을 확보하는 것은 건강한 사회를 구성하는 필수 기준입니다. 이 기준을 여성, 노약자, 장애인 등에게 맞춘다면 어느 사람도 당연히 건강한 사회의 구성원입니다.
여성, 노약자, 장애인 또한 기후 약자입니다. 극심한 기후 변화는 공중 보건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질병관리청 통계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온열질환 사망자 중에서 68.5%는 65세 이상이었습니다. 현재 노약자들의 열악한 주거 환경은 재해 발생 시 적절한 도움을 받기 어렵습니다. 지금까지 국제적으로 발표된 기후 변화로 인한 각국의 사망자 수치를 보면, 여성과 고령층이 치명적인 영향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후 변화로 인한 생명권과 생존권은 현재와 미래에 인권의 가장 큰 위기가 될 수 있습니다.
기후 위기는 모든 세대와 성별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나 기후 약자에게는 더욱더 치명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기후 위기로 인해 일어나는 현상들은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정의롭지 않은 상황을 만들어냅니다. 또 기후 불평등은 대표적인 세대 불평등입니다. 우리 삶의 편리를 위해 미래세대에 짐 떠넘기는 불평등입니다. 이런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기후 위기 대처 방안 중 하나로 여성, 노약자, 장애인 등의 생활 환경을 고려하는 것은 무척 중요합니다. 그들의 터전이 안전하고 건강하면, 내 삶의 터전도 안전하고 건강합니다.
5. 여성 농민은 여성과 농민의 정체성을 동시에 갖고 있습니다. 현재 가족농의 중심은 대체로 여성입니다. 여성 농민은 농사뿐 아니라 가사노동과 아이 돌봄, 노인 돌봄 등 대부분 관여합니다. 그런데도 여성 농민은 기후 위기와 젠더 문제의 교차성으로 인해 다중의 억압과 차별 상황에 놓입니다. 지난가을처럼 기후 변화로 급작스러운 벼멸구 출몰 같은 사건이 발생하면 농민들은 일시적으로 과도한 노동을 투입할 수밖에 없는데, 특히 여성 농민의 부담은 더욱더 커집니다. 여성 농민의 노동시간은 농작물 생육상태와 여건에 따라 다르고, 계절적으로 다릅니다. 한때의 작업에 한 해 농사가 달려있어 계절이나 농작물의 생육조건에 맞는 적기에 맞춰 일을 해야 합니다. 이런 농작업 특징 때문에 여성은 자신 몸의 상태에 따라 일을 조절하기 어렵습니다. 기후 위기는 그렇지 않아도 힘든 이 모든 상황을 더욱더 불안하게 만듭니다.
각종 조사에서 여성 농민 상당수가 기후 위기 영향을 직접적으로 느끼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작년 8월, 농업농민정책연구소 녀름이 전국 농축산물 생산활동에 종사하는 여성 농민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여성 농민 기후재난 실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기후 변화로 농사에 어려움을 겪는 강도가 커졌습니다. 기후 변화가 농사에 영향을 미친다는 응답은 99.3%에 달했습니다. 기후 변화에 따른 빈번한 농업재해, 급격한 농산물 가격 변동, 급증하는 생산비, 농가 부채 등으로 여성 농민들은 우울감도 심각하게 느끼는 것으로 나옵니다.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등 여성 농민들은 이 같은 상황에서 “정부 농정 방향에 기후재난 상황이 어떠한지, 재난이 성별에 따라 어떤 차이를 보이는지 성인지 측면이 고려돼야 한다”라며 “탄소를 많이 배출하는 수입 농산물 의존방식에서 벗어나 식량 자급률을 높이는 식량주권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농정 방향도 전환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기후재난 시대에 맞춰 지역별·작목별 특성에 맞는 농업생산 기반 시설을 전면 재정비해야 한다”라고도 말합니다. 또 여성 농민을 농업 주체로 기후 위기 대응 체계를 마련하고 농업재해 예방과 피해를 최소화할 대책 수립, 온열질환을 예방할 캠페인과 특수건강검진 확대, 기후재난 특별생계지원금 도입도 강하게 요청합니다.
6. 기상청이 발표한 최근 10년간 우리나라의 여름 평균기온을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여름 평균기온이 매년 꾸준히 상승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2024년 여름은 평균 최고기온이 30℃가 넘어갈 만큼 기록적인 더위가 이어졌습니다. 기후 위기는 점점 뜨거워지는 폭염을 피할 수 없는 기후 약자를 만들고 있습니다. 기후 위기 대처 방안을 만들 때 중요한 부분은 기후 약자를 염두에 두는 것입니다. 농업에서 여전히 존재하는 차별성을 안고 살아가고, 폭염 아래서도 논과 밭으로 나가야 하는 여성 농민은 기후 약자를 대표합니다.
많은 연구를 보면, 농업에서 기후 위기 해결의 핵심은 ‘소농’입니다. 유엔(UN)이 채택한 생태농업의 근간이기도 합니다. 생태적 순환을 촘촘하게 엮어내는 소농 중심적 농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소농 활동을 가시화시켜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소농 활동을 가장 잘 이해하는 주체는 여성 농민입니다. 지금까지 미진한 여성 농민의 지위를 보장해 주는 정책이 뒤따라야 합니다. 더 이상 여성 농민을 대상화해서는 안 됩니다. 주체적으로 농업과 사회에서 더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여성 농민이 겪는 불평등과 차별을 없애는 것이 기후 위기를 완화할 중요한 일입니다.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길은 더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지금 처한 현실을 직면하고 인식하는 것을 시작으로 개인이 할 수 있는 실천과 국가가 기후 위기에 더 이상 방관하지 않도록 제도와 산업, 정책이 변화할 수 있게끔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여성, 장애인, 소수자, 노약자의 입장이 포괄적으로 반영돼야 합니다. 여성 농민은 기후 위기에서 기후 약자를 보호하는 지표입니다. 기후정의 운동은 농민운동과 별개의 운동이 아니라 자본주의 성장체제 아래에 차별받는 이들을 위한 운동입니다. 2025년은 더 많은 기후 약자를 위해서라도 농민과 특히 여성 농민이 주체적으로 불평등과 차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그들을 기억하고 함께하면 좋겠습니다.